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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은 월극과 마찬가지로, 홍콩, 마카오, 주강삼각주 지역 및 서강지역 대중들이 즐기는 예술이다. 광의적인 월곡은 광동성내의 각 곡예들, 예를 들면 월곡 가창, 목어, 용주, 남음, |
| 워루 및 조주가요, 객가판가, 혜동 어가 등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월곡은 월곡 가창 혹은 광동 곡예를 일컫는다.월곡은 광주 방언구역에서 가장 유행되었던 희곡이며 15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광동성, 홍콩 및 마카오를 주요한 활동범위로 하면서 그 유행범위는 광동성과 광서성으로 넓혀졌다. 광동 적을 가진 화교가 집거한 세계어느 곳이든간에 모두 월곡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곡은 원래 월극의 가창기법이었으며, 후에 점차적으로 독립된 악극으로 되었다. 월곡의 특점은 음악성이 지극히 강하며, 청각예술을 중시하고, 창법을 중요시하는바, 창법은 피황계통의 반챵체, 방즈, 이황, 패자곡, 소곡, 가요로 그 주체를 이룬다. 월곡의 발전과 흥성은 중국 곡예의 발전에 기여를 했고 해외 화교들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유행되었다. 그중 여배우들이 중대한 공헌을 하고 그 업적이 뛰어나나 여 배우들의 운명은 그 당시 아주 비참하었다. 소명성은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소명성의 본명은 등만미이며 고아었다. 11세에 엽의손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무대공연에 참가하기 시작하었다. 그는 그 당시에는 없었던 특별한 가창기법인 성챵을 개발해냈으며 사람들은 그를 소명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었다. 17세에는 광주월곡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며 스타로 되었다. 항일전쟁시기 소명성은 선후하여 홍콩과 마카오에서 공연을 진행하었다. 그러나 그때 여배우의 수입은 높지 않았는바 소명성은 스타의 신분으로 비교적 높은 수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혼인생활은 평탄치 않았는바, 두번의 이혼을 거쳤다. 그녀는 후에 참략된 광주에로 돌아와서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러나 악단 사장은 병이 있는 그녀를 협박하여 공연하게 하였으며 1942년 8월의 어느 하루, 병을 안고 ¡°추분¡±을 공연할때 과로로 인하여 무대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31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녀는 당시 빚더미에 앉았기 때문에, 안장비도 없었다. 다행히 그녀의 제자들이 의창으로 돈을 모아 묘지를 마련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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